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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슈타우펜 왕조의 종말'세계적 경이' 프리드리히 2세 (2)

혁신의아이콘 2021. 12. 1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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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펜 왕조의 종말'세계적 경이' 프리드리히 2세 (2)

바르바로사가 당시로서는 장수를 누린 반면,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시칠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 메시나에서 뜻밖의 질병에 걸린 것이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나라의 국민들을 수백 년 동안 괴롭혀온 질병인 말라리아였다.

 

기온이 상승할 때면 영국이나 라인 강 유역의 주민들도 걸리곤 하던 질병이다. 통치자가 갑자기 사망하면 으레 그렇듯 하인리히 6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독살설이 나돌았다. 그 배후에 태후인 콘스탄체가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세계적 경이' 프리드리히 2세

하인리히 6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역사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신성로마제국(독일 제1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6세는 선제후들의 입김이나 선거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세습 체제를 확고히 구축하려고 했다. 병으로 사망하기 얼마 전 실제로 그런 시도를 했지만, 제후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 슈타우펜 왕조의 전성기였던 당시에 하인리히 6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독일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1870년경까지 이른바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이하며 여러 개의 군소국가로 쪼개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인리히 6세의 이른 사망으로 인해 독일 제국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스웨덴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유럽 국가 대부분이 걸은 길을 독일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하인리히 6세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다재다능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모든 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빛나는 매력을 지닌 그는 '스투포르 문디, 즉 '세계적 경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기작가들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웅을 찬미하며 칭찬 일변도의 내용만을 담는 작가들이 있다. 1927년 독일의 역사학자 에른스트 칸토로비츠는 프리드리히 2세야말로 매우 이상적인 통치자의 인성을 지녔던 인물이라며 칭송하는 책을 출간했으며, 덕분에 황제의 이미지는 더더욱 좋아졌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요즘 학자들은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직시하고 중립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2세를 미화하는 작업을 중단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황제의 업적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황제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나온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에도 프리드리히 2세가 매우 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고 말들을 하니 말이다(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기는 하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전에는 유대인 학자들이나 이슬람교를 믿는 학자들이 출입했으며, 호위병 중에도 무슬림교도나 에티오피아 출신의 용병들이 있었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급진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여러 명의 교황과 철천지원수 관계에 놓여 있었고, 그 교황들은 수차례에 걸쳐 황제를 교단에서 파문했으며,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바티칸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깡그리 잊은 채) 비웃고 조롱하고 환호를 내질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기본적인 성정이 나빴다는 뜻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재위 기간(1220~1250) 중 많은 시간을 시칠리아에 머물렀는데,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황제가 머무르는 궁전이 각종 규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예술과 문화, 자유로운 학술 연구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황제가 불타오르는 학구열 때문에 자녀들조차 멀리 떠나보내 다른 사람이 키우게 했다는 소문도 있다. 인류 언어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던 욕구가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음식물의 소화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산 사람의 배를 가르라고 지시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런 말들은 수많은 정적들이 황제를 비방하기 위해 세상에 퍼뜨린 헛소문에 불과하다. 황제의 학술적 업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그가 남긴 글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만큼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여러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던 통치자 프리드리히 2세는 1250년 12월 13일, 이탈리아 풀리아에 위치한 '카스텔 피오렌티노 성에서 최후를 맞는다. 황제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유행성 감염 질환이었다. 황제의 소화기관을 망가뜨린 질병은 티푸스나 파라티푸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훗날 역사가들은 그해를 기준으로 중세 전성기와 중세 후반이 갈린다고 평했다.

 

황제가 사망하자 교황청에서는 그 의도가 드러나는 적나라한 표현들로 황제의 죽음을 폄하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구토와 설사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는데, 신실한 믿음이 없는 죄인이자 종교의 배신자였기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보다는 중세의 연대기 학자인 파리의 마태오가 프리드리히 2세를 좀 더 제대로 평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름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으로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겠지만 파리의 마태오는 잉글랜드 출신이었고, 런던 북쪽에 위치한 도시 세인트올번스St. Albans 에 살고 있었다.) 파리의 마태오는 1251년, 프리드리히 2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통치자요, '세계적 경이’라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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