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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애정 행위의 어두운 그림자 "매독" (3)

혁신의아이콘 2021. 12. 22. 08:28

애정 행위의 어두운 그림자 "매독" (3)

매독이라는 무시무시한 성병은 고위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매독을 왕궁의 천연두라고도 불렀다. 병사들을 이끌고 나폴리 원정을 떠났던 프랑스의 샤를 8세도 매독을 프랑스에 퍼뜨렸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친절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샤를 8세가 연회나 음주가무, 난교 등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샤를 8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는 보기 드문 이유로 요절하고 만다. 실내 테니스를 즐기려 시합장으로 들어가던 중 문틀에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고, 결국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샤를 8세의 후계자 프랑수아 1세 역시 불공대천의 원수이자 라이벌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로스 5세와 마찬가지로 매독 환자였다는 설이 있지만, 세계를 주무른 정치가들의 병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으므로 확신하기 힘들다.

 

매독 환자라는 진단은 일종의 낙인으로 그 인물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즉 왕조 계승 문제 등으로 국왕과 갈등관계에 놓인 정적들이 국왕을 음해하기 위해 매독 환자였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정확하지 않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특정 통치자가 매독 환자였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런 이유에서 한 국가를 이끈 수장들 중 매독 환자였다는 의심을 받는 이들이 유독 많았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매독"

영국의 헨리 8세, 광기와 폭력적 성향 때문에 '끔찍한 폭군 이반'으로 불리던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 프랑스 국왕 루이14세와 15세 등이 대표적이다.

 

근세로 전환하는 시점에 발발한 매독은 급속도로 퍼졌고, 증세도 매우 심각했다. 당시 매독은 사회 구조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중세는 독실한 신앙과 종교적 규율을 강조하는 사회였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두들 육체적 쾌락을 즐겼다. '목욕 보조원' 이라불리는 소녀들이 부수적인 수입을 올리는 대형 욕장도 많았다. 하지만 매독이 발발하면서 유럽 대도시에서 성업하던 대형 욕장들은 급속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를 즈음해 혼외정사나 혼전 성교 등 자녀를 낳기 위한 목적이 아닌 모든 종류의 성관계에 대한 비난도 대대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물론 이 사안에도 교회가 관여했다. 그러면서 유럽 내 많은 지역에서 성교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서민들 사이에서는 웬만해서는 남녀가 관계를 맺지 않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일종의 도덕률도 탄생했다. 하지만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은 여전히 순결이나 정조관념과 거리가 멀었고, 늘 육욕에 찌들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매매 여성들은 매독을 옮기는 원흉으로 지목되었고, 나라별, 사회별 규범에 따라 윤락녀들을 다양한방식으로 탄압했다. 병원에 강제 입원시킨 경우도 있고, “창녀는 매독의 원흉” 같은 낙인을 찍어서 괴롭히는 경우도 많았다. 당대를 주름잡은 계몽주의의 위대한 학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0 조차도 매우 극단적이고 비인간적인 예방책을 제안한바 있다.

 

“결혼에 앞서 예비 신랑과 신부는 매독 검사를 받아야 했다. 둘 중 하나가 매독에 감염되었다면 혼약을 깨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이와 관련해 가장 좋은 방법은 악의 근원을 뿌리부터 뽑는 것이라 말했다. 매독에 최초로 감염된 자들을 화형에 처했다면 평온한 세상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아가 매독에 걸린 남성들은 거세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의사 가브리엘레 팔로피오는 1564년 매독에 관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프랑스 질병》이라는 책을 펴냈다. 참고로 '매독' 이라는 병명은 팔로피오가 천문학자인 지롤라모 프라코스토로와 함께 1530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병명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에야 확고한 병명으로 자리 잡았다.

 

저서에서 팔로피오는 매독의 증상과 당시의 처치법을 소개했고, 나아가 전염을 막는 예방법까지 제시했다. 파도바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 중이던 해부학 교수 팔로피오는 대규모 인원이 표본으로 참가하는 연구를 사상 최초로 실시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아마도 '코호트 연구'쯤 될 것이다. 팔로피오는 1,100명이 넘는 표본 집단에게 성관계를 가질 때 리넨 천으로 만든 작은 덮개를 사용할 것을 부탁했다.

 

남성의 성기에 그 천을 씌운 뒤 성기의 뿌리 부분을 핑크색 끈으로 묶으라고 요청한 후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타액으로 천을 미리 적시라고도 지시했고, 성기를 덮기 전에 리넨 천을 소금에 절인 약초 용액에 잠시 담근 후 사용하게 했다. 또 다른 실험 참가자들에게는 우유에 적신 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실험 결과를 정리하여 성병 연구 분야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저서에 자세히 기술했다. 결론은 자신이 제안한 방법 중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상관없이 매독에 감염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 덕분에 팔로피오는 콘돔의 창시자로 불린다. 지금도 콘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여러 방식의 실험을 기록한 저서를 바탕으로 콘돔의 창시자로 홀로 우뚝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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