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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애정 행위의 어두운 그림자 "매독" (4)

혁신의아이콘 2021. 12. 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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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행위의 어두운 그림자 "매독" (4)

팔로피오가 활동하던 시절에 이미 매독을 치료하기 위한 몇몇 시도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중 몇 가지 치료법은 매독보다 더 심각한 증세를 유도하는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다. 당시 의사들은 우선 매독만큼이나 신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유창목을 활용하는 치료법에 큰 기대를 걸었다. 나무껍질을 줄질해서 매끄럽게 다듬은 뒤 농축액을 뽑아내고, 그 수액을 복용하거나 연고처럼 바르는 것이었다.

 

인문주의자이자 풍자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울리히 폰 후텐도 유창목 치료법을 찬미하는 글을 써서 힘을 실어주었다. 후텐은 “내가 직접 관찰한 결과, 신속하거나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방법은 느리지만 일관성 있는 효과를 보인다. 그 약을 쓸 경우, 기대했던 것보다는 금세 효과를 볼 것이고, 통증도 비교적 빨리 완화되다가 결국엔 사라진다. 하지만 최초 14일동안은 질병이 최고조로 달하며 급성 통증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는 고통이 더 증가되고, 종기가 더 퍼지며, 환자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고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12라고 썼다. 하지만 후텐도 유창목이 매독균을 거의 치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분명 깨달았을 것이다. 1523년 후텐은 매독에 걸려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질병이 바꾼 세게의 역사 "매독"

매독 치료법으로 비교적 오래 사용되었던 약제는 중금속의 일종인 수은이었다. 수은은 대개 외용약, 즉 연고의 형태로 활용되었고, 상처가 난 부위에 펴바르는 방식이었다. 그와 더불어 열기를 가하는 방식도 자주 활용되었다. 폐쇄된 튜브관 같은 곳에 환자를 눕힌 뒤 열기를 쬐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환자가 느끼는 고통이 너무 심했고, 순환계에 이상이 생겨 결국 매독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은 성분이 포함된 약이나 사탕 모양의 알약을 복용하는 치료법, 수은이 포함된 증기를 흡입하는 치료법도 몇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수은을 이용한 매독 치료는 20세기 초반에 들어선 이후에야 비로소 폐지되었다. 수은에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거나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은이 포함된 약제나 치료법을 처방받은 환자들에게서 탈모나 치아 빠짐 현상, 나아가 중추신경계나 신체 내부기관이 망가지는 사례가 계속해서 관찰되면서 수은의 유해성이 입증되었다.

 

영어에는 매독과 매독 치료법 사이의 치명적 연관성을 지적하는 속담이 하나있다. “금성과는 하룻밤을, 수성과는 평생을!" 이라는 속담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금성은 아름다운 여자나 성매매 여성을 뜻하고, 수성은 매독 치료제로 활용된 수은을 의미한다. '성매매 여성과 하룻밤을 보낸 후 매독에 걸리면, 수은이 들어간 치료제를 써야 하므로 평생 고생한다'는 의미다.

 

매독 자체가 더 나쁜 것인지, 매독 치료법이 더 유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매독과 수은에 관한 한, 꽤나 정곡을 찌르는 속담인 것은 분명하다. 매독에 대한 현대적 치료제는 1909년에야 개발되었다. 독일의 면역학자 파울 에를리히와 일본의 미생물학자 사하치로 하타가 매독 치료제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살바르산이라는 약제를 개발한 것이었다. 참고로 살바르산은 비소라는 독성 화학성분을 기본 재료로 사용하는 약제다.

 

매독은 4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을 뿐 아니라 유럽 문화사에도 커다란 손실을 입혔다. 매독에 걸리거나 그와 비슷한 증상을 앓은 시인, 작가, 예술가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리던 이유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프랑스 예술가들 중에 매독으로 의심되는 환자들이 유독 많았다.

 

샤를 보들레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 에두아르 마네 , 폴 고갱,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어느 유명한 음악 백과사전에 따르면 베토벤도 매독 증상을 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베토벤은 꽤 젊은 시절에 이미 매독에 걸렸다고 한다. 음악 거장들의 삶을 다룬 어느 전기작가는 “베토벤이 매독에 걸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10명이 있다면, 베토벤이 분명 매독 환자였다고 말하는 학자도 10명이 있다” 라고 말했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당시 빈곤층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으레 그랬듯 천재 음악가 슈베르트 역시 매독이라는 운명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젊은 작곡가 슈베르트는 거의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이른바 '슈베르트의 밤' 이라는 이름의 파티를 즐겼다. 파티 장소는 주로 오스트리아 빈 시내나 인근 지역이었다. 슈베르트의 밤에는 술과, 여자 그리고 노래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당시 빈은 전 세계 모든 윤락녀들의 집결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민이 3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 성매매 여성이 무려 2만 명에 달했다. 1797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고 유럽을 재정비하기 위해 1814~1815년, 유럽 각국 정부의 수반들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모여 '빈 회의'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1822년, 그러니까 스물다섯 살쯤 되었을 때 매독에 걸렸다고 한다. 병에 걸린 슈베르트는 대낮에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종기 때문에 흉하게 변해버린 피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술 없이는 버틸 수 없었고, 두통은 일상이었다. 나중에는 극심한 위통에 시달려 음식물을 거의 섭취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매독은 그렇게 천재들의 창의력과 삶에 대한 의지를 앗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이 배출한 위대한 시인이자 발군의 수필가, 풍자가였던 하인리히 하이네의 이야기로 마감해볼까 한다. 1797년 12월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하이네가 초기에 쓴 글에는 가브리엘레 팔로피오의 발명품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성병과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도구가 독일 고전주의 작가의 작품에 언급된 것이다. 매서운 칼바람과 동장군이 위세를 부리던 1824년 2월 어느 날, 하이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쓴다.

 

“어제 저녁, 새로 문을 연 직물가게 여주인에게 6개의 '(콘돔)'을 주문했네. 내 사이즈에 맞게 제작해달라고 부탁했고, 연보라색 실크를 사용해달라고도 말했지.” 18 당시 괴팅겐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하이네는 같은 편지에서 마음이 어찌나 갈대처럼 흔들리는지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사랑 때문에 내 마음이 매우 무겁다네. 이젠 더 이상 단 한 사람만을 향하던 예전의 그 마음이 아닐세. 사랑에 있어서는 나는 유일신만 섬기는 신자가 아니야. 난 맥주를 마실 때도 두 배로 강한 걸 마시잖나. 사랑도 '더블'이 좋다네.”

 

하이네는 비단으로 제작한 콘돔만이 매독이라는 끔찍한 성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유일한 수단이라 믿었다. 매독은 당시 독일에서, 나중에는 유흥의 천국인 파리에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든 질병이었다. 하이네의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을 꺼리는 몇몇 전기작가들이 하이네는 매독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에 걸린 것이라고 나름 미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하이네 자신은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매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하다.

 

노동운동의 선구자인 페르티난트 라살레가 그 증인이다. 라살레는 1856년, 하이네가 눈을 감기 얼마 전, 당시 하이네가 거주하고 있던 파리의 집을 방문했다. 라살레는 그날 친구인 하이네로부터 들었던 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공개했다. “나를 보더니 그가 아주 좋아했죠. 그런데 인사를 건네자마자 큰 소리로 (성기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 좀 보게, 대체 이게 무슨 끔찍한 일인가! 그간 내가 이 녀석에게 그렇게 봉사를 했는데, 이 녀석은 날 여기까지 몰고 와버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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