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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

슈타우펜 왕조의 종말'세계적 경이' 프리드리히 2세 (1)

혁신의아이콘 2021. 12. 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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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펜 왕조의 종말'세계적 경이' 프리드리히 2세 (1)

역사는 다양한 계층의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다. TV 프로그램 중에서도 역사 다큐멘터리는 나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몇몇 나라에는 역사 관련 프로그램만 방송하는 채널이 따로 있을 정도다. 대부분의 서점에는 역사 관련 서적만 전시해둔 공간이 따로 있으며, 런던 피카딜리서커스 역 인근에 있는 영국 최대의 서점 워터스톤즈Waterstones는 한 층 전체를 역사 관련 서적에만 할애하고 있다.

 

또한 독자들은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에도 관심이 많지만, 역사적 배경을 소재로 한 소설에도 관심이 많다. 역사는 수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르이자 상품성도 갖추고 있다. 유명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역사 전문 잡지들을 출간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 역시 역사에 관심이 많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역사의 여신 클레이오의 팬들이 아닐까?

'세계적 경이' 프리드리히 2세

특히나 대중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1977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주관한 슈타우펜Staufen 왕조) 전시회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전시회가 열린 기간은 두달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주최 측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많은 65만 명의 관람객들이 그곳을 다녀갔다. 전시회가 열리는 기간내내 슈투트가르트 구舊 궁전 앞에는 기나긴 줄이 이어졌으며, 이후그와 유사한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생겨났다.

 

1981년 아직 분단되어있던 베를린 장벽 바로 옆에서 개최되었던 〈프로이센 전시회>도 그중 하나다. 지금도 수많은 미술관들이 역사 관련 유물들을 고정적으로 전시하고 있고, 한시적 역사전도 자주 개최하고 있다. 특히 독일의 본과 라이프치히 그리고 베를린에 위치한 역사박물관들은독일 근현대사와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슈타우펜 왕조는 이처럼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북돋는물꼬를 터주었다. 지금부터는 그 왕조를 병력전기학적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겠다. 슈바벤에서 탄생된 슈타우펜 왕조의 역사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너무 먼 옛날의이야기가 아니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흥미진진한 시대였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암흑의 시대'라 불리던 중세 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몇몇 베스트셀러역사서들은 중세 시대가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대이동이 있은 이후, 즉 중세 초기는 암흑의 시대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중세 후반도 그러한 수식어가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다. 1315년경부터 시작된 기상 이변이 위기를 초래했고, 무엇보다 (페스트에서 자세히 살펴봤듯이) 1348년부터 번지기 시작한 흑사병이라는 커다란 재앙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타우펜 왕조가 통치하던 12~13세기는 발터 폰데어포겔바이데같은 훌륭한 시인을 탄생시키고 위대한 건축물들을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쾰른 대성당은 그로부터 600년 뒤에야 비로소 완공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슈타우펜 왕조 때 축조하기 시작했으니 해당 왕조의 업적이라면 업적일 수 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일러두자면, 슈타우펜 왕조가 영광의 시대, 문화 대번성의 시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도 전쟁, 폭력, 살인, 고문은 있었고, 성장과 번영을 거듭하고 있는 경제적 상황 속에서도 빈곤한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분명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시 의술로는 치료 방법이 없는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도 많았다.

 

슈타우펜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왕인 프리드리히 2세와 그 이전의 왕들도 의학 기술의 부족으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1세는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바르바로사Barbarossa'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왕으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바르바로사는 어느 날 키프호이저 산 어딘가에 머무르던 중 가여운 독일 백성들을 비참한 현실에서 해방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 즉 바르바로사는 십자군에서 부대를 차출해 동방 원정길에 올랐다. 1190년 6월 10일,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바르바로사는 살레프강(지금은 터키 영토) 근처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때는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강물은 몸을 담그고 싶은 유혹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했다.

 

당시 바르바로사의 나이는 대략 예순여덟 살 정도였다(생년월일 미상), 백발이 성성했을 나이다. 당시로서는 성서에 등장하는 최장수 인물 므두셀라에 비견할 정도로 오래 산 것이다. 부하들은 강물에 뛰어들지 말라고 간곡히 청했지만, 수영을 매우 잘했던 바르바로사는 부하들의 충언을 무시했다. 그런데 물의 냉기와 공기의 뜨거운 열기 사이의 온도 차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바르바로사는 물속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당시 황제가 익사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보다는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쨌든 황제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부하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당시 부하들이 황제의 주검을 보존하기 위해 취한 방식은 지금 독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부하들은 황제의 시신이 무더운 상온에서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뼈에서 근육과 피부조직을 분리했다. 그렇게 보존된 시신의 일부가 나중에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르바로사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망한 뒤, 제3차 십자군 원정은 프랑스의 필립 2세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가 계속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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