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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를 바꾼 흑사병 페스트(3)
페스트는 상인들, 난민들 그리고 여행객과 여행객들의 짐가방을 통해 전파되었다. 당시 직물 교역은 경제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기둥 중 하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모직물은 벼룩이 서식하기에 매우 좋은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벼룩들에게 있어 최고의 서식지는 화물선에 화물과 같이 탑승한 쥐의 털이었다. 페스트의 확산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영화로 노스페라투 Nosferatu>를 꼽을 수 있는데, 참고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Friedrich Wilhelm Murnau (1922)와 베르너 헤어초크 Werner Herzog (1979)가 만든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당시 항구도시들은 선박의 입항을 불허했고, 격리 조치를 취했다.
아드리아 해 연안의 도시 라구사Ragusa (현재 지명은 두브로브니크 Dubrovnik) 도 페스트 예방 조치를 모범적으로 실행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대비책에는 본디 빈틈이 많은 법이다. 잉글랜드의 대비책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을 치른 천하의 숙적 프랑스에서 페스트가 확산되는 것을 보며 어느 정도 통쾌한 기분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스트는 국적을 가리지 않으므로 잉글랜드로서도 분명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었다. 배스와 웰스 Bath and Wells 교구의 주교는 “재앙에 가까운 역병이 동쪽의 왕국(프랑스)을 엄습했다. 그 독성 역명이 당 도달하지 않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페스트는 결국 항구도시인 멜컴을 통해 잉글랜드 땅에 당도했고 그곳을 기점으로 잉글랜드 영토 내 모든 섬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유입된 페스트로 사망한 이는 인구의 40~50퍼센트에 달했고 잉글랜드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한 이들의 분포도를 조사해본 결과 역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안심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역시나 고위층의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귀족들이 사는 저택은 목재나 점토벽돌을 사용하지 않은 석조 건물이 많았고 따라서 쥐들이 많이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콩나물시루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런던의 서민 밀집구역에는 쥐들이 들끓고 있었다. 페스트로 인한 귀족의 사망률이 27퍼센트였던 것에 비해 시골 주민이나 막노동꾼의 사망률은 지역에 따라 45퍼센트에서 7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프랑스의 불행을 보고 잉글랜드가 통쾌해했듯이 잉글랜드의 적국인 스코틀랜드도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랜드는 “적국인 잉글랜드의 상황과 악취를 풍기는 죽음'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1350년 여름, 스코틀랜드는 적국의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했고, 엄청난 병력 차이로 평소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시도를 감행했다.
잉글랜드와의 국경 사이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 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상대방의 위기를 기회로 삼은 스코틀랜드 군대에 “신이 복수의 손을 뻗었고, 영국 본섬의 북부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에도 페스트가 확산되고 말았다.
흑사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희생양 찾기에 나섰고, 그런가 하면 세상이 저지른 죄를 대속代魔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른바 '고행자flagellants'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중세는 종교의 힘이 강해 페스트가 진노한 신이 세상에 내리는 벌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을 분노하게 만든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도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광신도들의 목표가 된 이들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이었다. 유럽 곳곳에 퍼져 있던 유대인 공동체는 늘 그렇듯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주범으로 지목되곤 했다. 1348년 여름,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고, 뒤이어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결정권을 지니고 있던 고위층들은 겉으로 반대하는 척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대인 대량학살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들을 눈감아주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일이 다 유대인 때문이라는 음모론이 많은 이들의 뇌리를 파고들었고, 대량학살이 자행된 도시나 마을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독일 남부 콘스탄츠 Konstanz의 성직자였던 하인리히 트루흐세스Heinrich Truchsess는 대량학살과 관련된 구체적 내용을 담담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1348년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 (11월 1일)부터 1349년 성 미카엘 축일 Michaelmas (9월 29일)까지 쾰른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이 화형을 당하거나 살해당했다. 그것은 분명 “살해 행위였고, 많은 역사가들은 그 시기에 자행된 범죄의 규모가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을 계획적으로 말살하기 전까지 중세 유대인 사회가 맞이한 가장 큰 참사라 말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당시 수많은 도시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비교적 면밀하게 연구했다.
스위스 바젤Basel에서는 라인 강의 하중도河中島 한 곳에 위치한 목재 건물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건물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1349년 2월 14일, 미처 도주하지 못한 유대인 시민들이 발가벗겨진 채 공동묘지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밸런타인데이였던 그날, 마을 전체 주민 1,800명 중 약 900명가량이 몰살당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고행자들은 일련의 광신도들로 고행단을 꾸려 활동했으며, 끝부분에 철조각이 달려 있는 채찍으로 자기 몸을 사정없이 내려치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깜짝 놀라고 겁에 질렸다. 고행단이 자기 신체를 학대하는 목적은 인간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었다. 그들은 과도한 행위로 귀족뿐만 아니라 교단의 고위층으로부터도 불신의 눈초리를 받았다. 고행단들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는 고행단이 학살자들 곁에서 범죄 행위를 선동했다고 한다.
1352년 여름, 페스트가 유럽 대륙을 횡단하며 모스크바에 입성한다. 유럽의 대도시들 중 마지막으로 페스트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차르가 통치하던 러시아의 수도였던 모스크바는 크림 반도에서 북쪽으로 1,000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카파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먼 거리에도 아랑곳없이 교수형을 집행할 때 쓰는 동그란 밧줄 모양의 경로를 따라 모스크바까지 이동했다.
전 유럽을 뒤흔든 페스트는 유럽인의 의식 속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그로부터 몇 세기가 지난 뒤에도 사람들은 페스트라는 말 만들으면 묵시록적 종말, 즉 세상의 멸망을 떠올리곤 했다. 1498년,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목판화를 제작했다. 〈묵시록의 네 기사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라는 제목의 목판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의학사에 대해 깊이 연구한 역사가 한스 샤데발트 Hans Schadewaldt는 판화 속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붉은말 위에는 '전쟁'이 커다란 검을 든 채 앉아 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학살하게 만들어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권세를 받았다. 검은 말 위에는 저울을 든 사내가 앉아 있는데, 저울은 '밀 한 돼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돼도 하루 품삯'이라는 계시록의 구절, 즉 '기근'을 상징한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말 위에 앉아 있는 이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다. 흰 말 위에도 기수가 하나 앉아 있는데, 그 기수는 활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시 발생했고 4세기 뒤에 다시 등장할 페스트라는 '질병'을 상징하는 것이다. 활과 화살은 질병과 의술을 관장하던 그리스의 신 아폴론이 역병을 유발할 때 활용하던 도구였다. 트로이아 전쟁 때 아폴론이 그리스 군대에 역병을 퍼뜨렸다는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llias》에도 등장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나아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화살은 역병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페스트는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특히 17세기 들어 다시 페스트가 대유행했다. 30년전쟁을 비롯해 당시 발발한 수많은 전쟁을 틈타 페스트는 더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시절에도 묵시록의 네 기사(전쟁, 기근, 사망, 역병)'가 여기저기에 등장했다. 과거보다 발전된 의료 기술도 페스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온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왕진을 하던 의사들은 역병의 치료법은 고사하고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과 동물을 키우는 축사를 구분하기 시작하고 계몽주의 시절을 맞아 사회 일부 계층에서 위생 관념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페스트의 파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후 1722년 마르세유를 마지막으로 페스트는 유럽 대륙에서 잠잠해졌다.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지역별로 편차가 매우 크지만, 역사학자들은 1347년부터 1352년까지 유럽 전체 인구 중 30퍼센트가 흑사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그 수는 대략 1,8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의 지시로 시작된 어느 조사에서는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정확히 4,283만 6,486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수치는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듯하다. 한편, 흑사병은 분명 엄청난 인명피해를 불러왔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호전되는 이점을 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여 모든 분야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살아남은 수공업자나 농부들은 그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처나 지주들과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서유럽과 북유럽을 비롯해 유럽 내 수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했고 농노를 구하기 힘들어져 노예를 부릴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생필품 가격도 일시적으로 상승했으나 이내 하락했다. 1347년 이전에 비해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식량 부족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중세 시대의 인구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계층은 농민이었는데, 할당받은 토지의 면적이 너무 작아서 자신의 사망 후 장자長子에게만 겨우 물려줄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450년 무렵에는 모든 자녀에게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할당 받는 토지의 면적이 넓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딸들에게도 땅을 물려줄 수 있을 정도였다. 흑사병이라는 대재앙이 이러한 긍정적 효과를 불러온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역병이 번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대부분 지역은 기근과 빈곤에 시달렸다. 몇몇 지역은 인구 과밀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가 발전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1352년 이후 인구수가 급감하면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제한된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수확량이 적은 토지들은 목초지로 전환시켰고, 기술 혁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방앗간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제 곧 다가올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지만 유럽은 결국 페스트라는 납골당에서 벗어났고, 비 온 뒤에 해가 비치듯 역병을 딛고 굳게 일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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